1.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새롭다.

어렸을 때 내게는 누이가 하나 있었다. 나보다 세 살이 더 많은 그 누이는 유난히도 얼굴이 희었고, 말이 별로 없었다. 내가 뭐라면 고작 억지인 듯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게 그가 보이는 성의의 전부였다.

나와 누이는 다른 친구가 없었다. 한참 친구를 사귈 시기에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한 탓도 있었지만 무슨 병인가로 늘 아파 하는 누이가 거의 집안에서만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 나가신 어머니가 돌아오는 저녁때까지 마루와 장독대 그리고 텃밭으로 옮겨가는 햇살을 따라 해바라기를 하거나,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빗줄기와 그것이 만드는 물방울들을 보면서, 주로 그렇게 집안에만 박혀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나의 유일한 친구는 누이였고 누이의 유일한 친구는 나였다. 그런 누이가, 3학년에 막 올라간 어느 화창한 봄날, 돌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것은 당시의 나에겐 곧 한 세계의 상실을 의미했다.  

누이 위에는 나와 9살 터울인 형이 있었으나, 그 무렵의 나는 형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누이가 죽었을 때도 형을 보지는 못했다. 타관에 나가 있던 형을 처음 보게된 것은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가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형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느끼는 형과의 거리감은 사실상의 나이 차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하기에 누이의 죽음은 내게 엄청난 상실감으로 다가왔고 그것은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2. 노래 하나를 듣다가도 우리는 문득 어떤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고, 어떤 책을 뒤적이다가도 불현듯, 이젠 세월의 한 켠에 묻어버린, 그래서 사뭇 잊고 지내던 지난 시절의 기억들과 만나 새삼 거기에 빠져들기도 한다.

박경리가 1962년에 펴낸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대할 때면 소롯이 떠오르는 것은 바로 내 어린 시절의 그런 사적인 기억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설 <김약국의 딸들> 표지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집을 떠나 생활해야 했던 나는 상급생이 될 때까지도 예의 저 상실감으로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았다. 손에 잡히는대로 책을 읽는 게 버릇이었고 유일한 낙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생활하던 외가쪽의 먼 친척집에는 읽기에 부족하지 않을만큼의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김약국의 딸들>을 처음 읽게된 것도 아마 그 어름이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김약국의 딸들>이 지닌 그 비극적인 내용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감성이 여린 탓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당시의 내겐 감정의 정화보다는 오히려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을 안겨주었으며, 그 두려움은 아주 엉뚱한 방향에서 나를 사로잡곤 하였다.

그 무렵 나는 동급생인 여자애 하나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누이의 그것과 꼭 같은 분위기를 가진 여학생이었는데, 문제(?)는 그가 읍내에 있는 김약국집 딸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애를 볼 때마다 <김약국의 딸들>이 처한 그 비극적인 운명이 생각나고, 내 누이의 쓸쓸하던 모습과 그 돌연한 죽음이 생각나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상한 감정이었다. 열병과도 같이 나를 달뜨게 혹은 안타깝게 하던 그것은 두려움도 희열도 아닌 그런 감정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열쩍고 우스운 얘기일 뿐이지만, 그러나 당시의 내게 그 감정은 대단한 것이어서,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계속하여 흡사 무슨 열병처럼 나를 힘들게 하였다. 그 뒤 곧 학교를 그만두고 세상을 떠돌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런 두려움 비슷하던 열정에서도 점차 벗어나긴 하였으나, 지금도 <김약국의 딸들>만 보면 오롯이 그 시절의 누이와 그애가 생각나는 것은 매한가지다.

이같은 연유로 나는 <김약국의 딸들>을 좋아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무슨 앙금처럼 남아있는 저 이상한 열정과 왠지모를 두려움,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어떤 안타까움까지를.


3. <김약국의 딸들>은 소설 읽는 재미를 한껏 느낄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불륜을 의심받아 비상을 먹어야 했던 할머니와 한갓된 의심의 칼을 피로 물들이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할아버지, 그들의 씨가 되어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란 아버지, 그리고 그 씨를 이어 받은, 그리하여 업보처럼 그것을 견디면서 살아가야 하는 김약국집 다섯딸들의 이야기가 한일합방과 식민지 시대의 통영 앞바다를 배경으로 비정하게 그려져 있다.

다섯 딸들과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를 잔인하게 떠밀며 피할 수 없는 낭떠러지로 몰아가는, 3대에 걸친 김약국 집안의 비극적인 운명은, 안타까운 삶의 몸부림들을 뒤로한 채 저들을 유린하다가, 끝내는 바다가 '남해호'를 삼키듯 그렇게 김약국의 집안을 삼켜버린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허망하게.

소설을 읽고 나서의 저 망연함에서 벗어나, 그러나 다시한번 찬찬히 이야기를 음미해보면, 소설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삶이 기실은 지금 우리의 이웃들과 우리의 삶에 다름아니고, 그들의 숨결이 여전히 우리의 숨결 속에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부여안고 아프게 몸부림치던 저 운명을 이제는 우리가 보듬고 아파하며 그것을 우리의 삶으로 엮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그랬듯이 주어진 삶은 또 그렇게 견뎌가야 하는 것임을, 삶이란 어떤 경우에도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어떤 특정한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의 다양한 삶의 궤적을 그려 보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사회와 삶에 대한 총체적이고 반성적인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소설이 갖는 기능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김약국의 딸들>은 분명 그 기능에 충실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도 그것을 견디고 살아가려는 김약국집 딸들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신난한 삶의 모습은 독자들이 그들 자신이 꾸려가고 있는 삶에 대한 보다 깊이있는 인식을 가질 수 있게 하고, 그러한 인식은 독자들의 삶을 훨씬 풍요롭고 치열하게 혹은 반성적으로 고양시킨다.


4. 이 소설에는 종교나 사상 문제가 거론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 무속신앙, 무신론 등이 어우러져 제각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 첨예한 대립을 계속하고 있는 참여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아마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과, 소설이 결코 작가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작가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다.

'냄새를 피우면 진실성이 감소되는 거야. 냄새가 나지 않을 때 자연스러운 거지. 예수쟁이도 말야. ... '독실이라는 것은 요새 보니까 고정된 어느 형이더군. 마음이 아니라 어느 형식이더란 말이야. 특히 예수쟁이들에게 있어서는....'

'오빠야말로 공식적이군요. 말로나 생활로 표현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즉 신비라는 것 말이지?'
'그래요. 오빠는 죽음을 생각해 보셨어요?'
'생각해 보았지. (....) 무섭더군. 그러나 네가 말하는 하나님의 힘을 빌리고 싶지는 않더군. 일찍이 그 어느 누가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느냐 말이다. 너희들의 하나님인 크리스트도 못 박혀 죽지 않았느냐 말이다.'
'모독이에요.'
'불쾌한 말이로군. 너는 그를 신격화하지만 난 그를 인격화하거든. 그는 그 시대에 있어서 가장 지혜롭고 위대했던 사람이야. 하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은 아니야. 역사 속의 인물로서 이제 사라진 인물이란 말이야.'
'아니에요. 지금 현재, 나는 그분의 지배를 받고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천만에 말씀. 너는 그를 신격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약한 인간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의 권위를 빌려서 인간들을 지배하고자 한 자들에게 너는 우롱 당하고 있다.'
'그래서 결론은 뭐예요?'
'우리들은 현실 속에서 잘 사는 일, 그것을 믿으라는 거다.'


김약국의 둘째 딸 용빈과 그의 사촌 오빠인 태윤이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벌이는 이들의 대화는 사실상 지금도 여전히 좁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앎과 믿음 사이의 거리에 관한 이야기에 다름아니다.

다음은 태윤과 그의 형 정윤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서로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비굴에서 비롯된 에고이즘이군. 형은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너처럼 이상주의자도 아니고 사회 개혁론자도 아니다. 말하자면 너처럼 허풍장이가 아니란 말이다. 실상 너는 사상이니 뭐니 하지만 자신은 지리멸렬이다. 모순덩어리다. 너의 이상이라는 건 자가당착의 표상이란 말이야. 나는 그게 우습다는 거다.'
'비겁하고 소심한 자의 변용이 항용 그러합디다. 무사상에서 오는 약빠른 부정이죠. 아무것에나 적응해 나가려는 약자들의 자기 합리화거든요.'

'나는 스스로 진리 탐구자가 되기 보담 현실의 이행자가 되려네, 자신을 위하여. 자유 아닌가?'
'탐구자가 없는 곳에 이행자가 있을 수 있어요? 출발이 없는 곳에 목적이 있어요?'

'역사가 없음 어떠냐? 역사는 곰팡내 나는 기록이지. 사람은 어떤 입지적 조건이나 생활 양식 속에서도 그 당대를 살기 마련이니까.'
'교묘한 회피군요. 물론 나도 역사는 그 당대에서 끝나는 거라 생각해요. 허지만 끝나면 다시 시작되죠. 마치 사람이 죽고 또 사람이 태어나듯이...'

'사회의 질서라는 건 사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거야. 그리고 또 완강하기 짝이 없는 거지. 그것은 모두 자연의 흐름이다. 기를 쓰고 덤빌 필요는 없다. 인간의 작의로 된 건 아니니까. 인간은 개인으로 살았고 개인으로 죽었다. 어떤 변혁이 와도 인간은 의연히 개인으로 대처한다. 개인이 질 때도 있다. 그 사회의 변혁이란 역사를 위해서 혹은 어느 집단을 위해서 있었다고 생각지 않아. 개인을 위해, 개인의 생활을 위해 있었다.'
'천만에, 아니지요. 일본제국이란 집단은 조선이란 집단을 먹었소. 개인이 먹은 것은 아니요!'
'너는 나에게 애국심을 강요하려는가? (....) 언제나 강한 놈은 약한 놈을 먹었다. 그것은 생물의 질서인 동시에 시회의 질서다. 실상 애국심이란 것처럼 모호한 것은 없다. 하나의 로만티시즘이지. 의식치 못하는 위선이지.'
'형은 반역자다! 일본제국의 침략을 합리화시키는 배신자다!'
'표현은 아무래도 좋다. 사실과는 관계가 없으니까. 일찍이 민족의 정의가 승리한 적은 없다. 힘이 승리했었지. 카르타고의 시민이나 한니발은 애국심이 모자라서 멸망하였느냐? 대영제국은 정의의 기치 아래 그 방대한 식민지를 획득하였느냐?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일 없는 사람들의 소일거리지. (....)'


현실주의자인 형을 비겁하고 의식 없는 소시민으로 몰아붙이는 동생과, 사회 개혁론자인 그런 동생을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져 있는 이상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있는 형 사이의 언쟁은, 그것이 비록 다소의 거친 감은 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핫 이슈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러나 약하기로 하겠다.


5.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일단 손에 잡으면 한숨에 읽게 되는 그 흡인력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이 갖추어야 할 여러가지 기본적인 요건들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흡인력일 것이다. 하여 으레 눈에 띄게 마련인, 잦은 문맥상의 불일치도 여기서는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탄탄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한 빠른 사건 전개, 그리고 그 속에서 각기 다른 개성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정확한 묘사, 이런 것들이 작가의 예리한 사회의식 및 토속적인 언어구사와 어우러져 이 소설의 독자를 그렇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덧붙이는글> 이 글은 피씨 통신 시절,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읽은 느낌을 적은 것이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오늘 향년 8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는 소식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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